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비관주의자와 낙관주의자. 둘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처럼 똑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방법으로 반응한다. 미국심리학회 마틴 셀리그먼 전(前)회장에 따르면 비관적인 사고방식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저서 <학습된 낙관주의-마음과 인생을 바꾸는 방법> 에서 박사는 참으로 흥미롭게 이를 설명한다.
첫째, 영속화. 일시적인 일인데 ‘언제나 그렇다’, ‘줄곧 이렇다’라고 영속적으로 본다. 예를 들면 상사에게 잔소리를 듣고 ‘저 상사는 정말 싫다’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상사의 싫은 점만 눈에 띤다. 상사의 질책은 한번 지나가는 사건이지만, 이를 영속적인 일로 간주한다. 이와 달리 낙관적인 사람은 ‘오늘은 상사가 기분이 언짢은 것 같아.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생각한다. ‘오늘 일’에 한정하고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다.
둘째, 보편화. 비관적인 사람은 한 가지 일이 잘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수학을 잘하지 못할 뿐인데 ‘나는 공부를 못해’하고 생각한다. 한 가지 실수에 대해 꾸중을 들으면 ‘나는 쓸모 없는 인간이야’, ‘더 이상 가망이 없어’ 하고 의기소침해진다. 꾸중 들은 점을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부정당했다고 생각한다. 작은 흑점을 마음 속에서 먹구름처럼 넓히고 만다. 그렇게 하면 위축되어 점점 더 실패한다. 악순환이다.
셋째, 비관적인 사람은 나쁜 일이 일어나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좋은 일은 타인의 힘이라든지,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운동경기에서 졌을 때 낙관적인 선수나 팀은 “이런 날도 있지”, “상대의 컨디션이 무척 좋았어”라고 말한다. 자기들 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비관적인 선수나 팀은 지고 나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말았어” 또는 “스스로 기회를 망치고 말았다”, “이렇게 공을 제대로 치지 못하니 어쩔 도리가 없지”라고 설명한다. 능력이 같다면 ‘낙관도’가 높은 쪽이 승리를 부른다고 셀리그먼 박사는 설명한다.
물론 지나치게 낙관주의인 나머지 무엇이든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현실을 외면해도 안 되지만, 자책해도 소용이 없는데 ‘자신을 괴롭히는’ 비관주의 또한 결점이다.
1997년, 셀리그먼 박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나는 박사에게 공감의 뜻을 전했다.
“마음의 작용은 불가사의합니다. 시인 밀턴은 ‘마음은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고 천국을 지옥으로 바꾼다’<실낙원>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인생은 어떻게도 바뀝니다. 불법(佛法)에서도 ‘일심(一心)의 묘용(妙用)’이라고 하여 그 점을 다각적으로 설명합니다. 불법은 ‘희망의 심리학’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희망’이 바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입니다.”
박사는 머리를 끄덕이고 커다란 몸을 내밀며 말했다. “낙관주의란 ‘희망’입니다. 아무런 괴로움도 없는 것이 낙관주의는 아닙니다. 언제나 즐겁고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실패하거나 괴로운 경험을 하더라도 그것은 ‘행동’으로 반드시 바꿀 수 있다, 그렇게 믿는 ‘신념’이 낙관주의입니다.”
박사에 따르면 낙관주의인 사람이 일이나 인간관계에서도 성공하고 건강에도 좋다. 오래 산다고도 한다. 특히 40대 후반부터는 생각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진다.
셀리그먼 박사의 학설은 ‘인간은 바뀔 수 있다’,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자기 혁명을 할 수 있다’는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셀리그먼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심리학은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춰 왔다면서, “나는 일반 사람에게도 용기를 주고 희망을 끌어내 약한 사람을 강하게 바꾸는 ‘긍정 심리학’을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사실 박사는 ‘나는 본디 비관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낙관주의를 배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박사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아버지의 죽음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유능한 공무원으로 뉴욕주 고위관리 선거에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박사가 열세 살 때 뇌출혈로 쓰러져 몸은 영원히 마비되고 말았다. 희망을 잃고 돌아가시기까지 몇 년 동안 ‘무력감’으로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보며 무엇이 인간을 ‘노력해도 소용없다’고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그것을 이겨 내는 방법은 없는지 탐구하자고 박사는 결심했다.
그런 원점이 있어서일까, 박사의 학문에는 인간적인 ‘따뜻함’이 있고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높은 뜻’이 있다. 나는 그 점을 존경한다. 셀리그먼 박사의 ‘심리학 혁명’은 ‘프로이트 이래 가장 중요한 심리학 혁명’이라고 불린다. 거기에는 인간의 잠재능력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다.
셀리그먼 박사는 벽에 부딪혔을 때 스스로 자신에게 어떤 설명을 하는가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하는 ‘자신과의 대화’를 인식하도록 하는 데 주력한다.
오랫동안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각하는 버릇’을 알지 못한다. 버릇을 알려면 사소하고 불쾌한 일이 있을 때 어떤 식으로 생각했는지 적어두라고 박사는 권하고 있다. 자신이 사물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알게 되면 그 점을 고치고자 ‘자신에 대한 반론’을 연습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친구에게 ‘전화해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는데 걸려 오지 않는다.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나를 무시하는 걸까?’, ‘내가 언제나 제멋대로니까 전화가 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하고 자신에게 설명한다.
만일 이렇게 비약하는 말을 남한테서 듣는다면 반드시 반발하고 반론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말할 경우에는 그렇다고 착각하고 만다. 그러므로 냉정하게 ‘자신에게 반론’을 해본다. ‘저 사람은 언제나 내게 친절했잖아. 무시할 리 없어.’ ‘저 사람은 이번 주는 바쁘다고 했으니까.’ ‘저 사람은 지금 컨디션이 안 좋은지도 몰라.’
‘게다가 만약 정말로 무시한다고 해도 그것이 어떻다는 거야!’ ‘누구나 나를 좋아해야 하고 무엇이든 완벽해야 한다고 누가 정했는데?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열심히 하고 있어. 내가 나를 칭찬해주자!’
이런 식으로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훈련하고 ‘낙관적인 말’을 마음에 새겨 넣어야 한다. 신앙자는 ‘기원’ 속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기술’은 자전거나 수영처럼 일단 요령을 익히면 평생 잊어버리지 않는다.
나는 불법이 최고의 ‘희망의 심리학’이며 ‘희망의 생명학’이라고 믿는다. ‘부처’는 마음의 불가사의한 힘을 터득한 사람을 가리킨다. 인간은 ‘마음’에 따라서 어떻게도 바뀔 수 있다. 이 과정을 나는 ‘인간혁명’이라고 부른다.
불법철학은 한 사람이 ‘마음’을 바꾸면-한 사람의 ‘인간혁명’이- 사회도 국토도 바꿀 수 있다고 드높이 선언한다. 하물며 자기 인생쯤은 자기가 정한 대로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무엇 하나 단념하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