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함께 사는 한 갈등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전쟁은 그렇지 않다.
“갈등이 있어요.”라는 말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요.”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공통된 문제는 공통된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
서로 대치하기보다는 이마를 마주하고 마음을 합쳐
청년의 번영을 위해 공통된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평화와 군축
사회 혹은 시대 상황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의 주변에서 평화를 실천할 수 있다.
다름 아닌, 한 사람 또 한 사람의 청년을 격려하고
그들이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펼치도록 해주는 일이다.
평화와 군축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왜곡되지 않은 관점에서 보면,
모든 전쟁은 인류가 인류를 상대로 일으킨 ‘내전’이다.
평화와 군축
인간 생명의 대지 속을 깊이 파고들어 가면,
거기에서 동고(同苦)와 자비라는 샘을 발견하게 된다.
방대한 인간의 다양성과 생명의 교향곡을 만들어내는 샘이 있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역할과 목적을 지닌다.
이 근원의 샘으로 돌아가기 위한 투쟁이
모두를 위한 진정한 르네상스를 실현하는 길이다.
평화와 군축
평화는 단지 조용하고 근심 걱정 없는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화는 행동 속에 존재한다.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리는 불의(不義)에 맞서
용감하고 평화롭게 투쟁하는 속에 평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불의에 대한 저항심을 잃고 무관심과 냉담함에 빠지면
사회는 전쟁의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평화와 군축
평화는 인류의 보편적 소망이다.
하지만 평화의 열쇠는 어디에 있는가?
미국의 평화학자 엘리스 볼딩 박사는 내게
“위기의 순간에 행동하는 것만이 평화가 아닙니다.
일상 생활에서 서로를 돕는 일도 평화입니다.
가족과 지역 사회가 평화의 중요한 출발점입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평화는 머나먼 꿈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시작되는 현실이다.
엘리스 박사는 항상 이웃을 알아가려고 노력했다.
서로를 더 잘 알게 되면, 서로를 더욱 돕고 지원하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서 평화는 시작된다.
평화와 군축
누구라도 평화를 위한 교육에 참여할 수 있다.
간단하게는 시간을 내서 자녀 혹은 이웃 청년들과 함께
‘생명의 존엄’과 ‘인간의 평등’에 관해 대화하는 일이다.
사소해 보이는 그러한 노력의 영향력을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평화와 군축
평화를 위한 대화와 교육은
타인에 대한 불관용과 거부감을 사라지게 한다.
타인을 증오하며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차별과 편견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물들게 된다.
평화를 창조하는 열쇠를 쥐고 있는 세대는 바로 청년들이다.
평화와 군축
인간 정신은 가장 어려운 상황조차 탈바꿈시켜,
가치와 의미를 창조하는 힘을 갖고 있다.
자신의 무한한 정신성을 개화하고,
긍정적 변화를 위해 헌신하는 평범한 시민들이 결속할 때
비로소 ‘평화의 문화’ ‘생명의 세기’가 도래하게 된다.
평화와 군축
‘우리 모두는 지구주민’이라는 공통 의식을 일깨워야 한다.
이러한 자각은 결코 어딘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 화면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나와 같은 사람의 아픔을 나누고자 하는 진심에 있다.
“누군가가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구든지, 어떠한 괴로움이든지,
나 또한 괴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하는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