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가을, 모스크바의 카잔 역. 8살 소년 아이트마토프는 어머니, 남동생 그리고 두 명의 여동생과 함께 기차에 올랐다. 아버지가 환송하러 나와 주었다.
“어찌된 영문인가?” 소년은 왜 아버지가 급하게 가족을 고향 키르기스스탄에 보내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인망(人望)이 두터운 사람으로 창설한지 얼마 안 되는 키르기스스탄 공산당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중앙당의 교육기관에서 공부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모스크바에 와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 소련에서는 이미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독재자의 한 마디로 몇 천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하는 숙청의 폭풍우가 아이트마토프 집안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위험을 탐지한 아버지는 적어도 가족만큼은 구해야 한다고 결단을 내렸다.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창문에 손을 댄 채 걷기 시작했다. 어린 동생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손을 흔들었다. 기차가 점점 속도를 내자, 아버지의 발이 따라오지 못한다. 긴 플랫폼이 끝날 때까지 이별을 아쉬워하며 아버지는 달리고 또 달렸다.
누구에게도 잊을 수 없는 인생의 광경이 있다. 그 한 순간에 생애를 압축한 듯한 순간이 있다. 아이트마토프씨는 그 날이 ‘9월 1일’이었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카잔 역 근처를 지날 때마다 생각한다. “그 때 아버지 당신께서는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고향 키르기스스탄의 자연은 아름다웠다. 바람이 달리는 대초원. 푸르른 창공에 솟아오른 텐산 (Tien Shan) 산맥, 청렬한 시냇물, 푸른색으로 빛나는 호수, 은백색 물결, 포플러 나무로 덮인 언덕. 밤하늘을 가득 채운 수많은 별빛의 광채.
그러나 그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일가족은 마을의 외진 구석에 몸을 숨기듯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소식을 당에 확인한 결과는 ‘징역 10년. 서신교환 금지’였다. 그러나 그것도 거짓이었다. 그 때 아버지는 이미 사살되었던 것이다. 카잔 역에서 헤어진 뒤 두 달 후의 일이었다. 35세의 젊음이었다.
가족이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어린 여동생은 생후 6개월이었다. 몸이 약한 어머니의 어깨에 무거운 생활고가 닥쳐왔다. 어머니는 집단농장의 경리를 하면서 자식들을 길렀다. 아이트마토프 소년도 어릴 적부터 밭에서 일했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은 차가웠다.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처벌을 받은 걸 보면 아버지는 나쁜 인간이다’고 간단히 생각했다. 아이트마토프 소년이 성씨를 말하는 것도 괴로웠던 순간도 있었다.
그런 속에 ‘자신의 눈을 올바르게 뜬’ 총명한 사람들도 있었다. 마을의 초등학교 선생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소년에게 말했다.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말할 때, 결코 눈을 내려 떠서는 안 된다. 알겠니?”
이 한 마디는 소년의 ‘일생의 보배’가 되었다.
“선생님은 내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내가 처음 아이트마토프씨를 뵌 것은 1988년 도쿄에서였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기수’로서 활약하고 계셨다. 이후,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 대통령회의의 일원이 되어 ‘신사고’라는 휴머니즘의 정치철학을 뒷받침했다. 악수를 나누는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 사람은 사자와 같은 용기의 사람이다.’ 불굴의 의지를 간직한 호탕한 풍모. 가슴에 난로가 타고 있는 듯한 탄탄한 체격.
아이트마토프씨는 1928년 12월 생. 나와 같은 해다.
“우리 시대는 어려서 전쟁을 체험했습니다. 전쟁이 얼마나 사람들을 깊은 괴로움에 빠뜨렸는가. 얼마나 배고픔과 슬픔을 가져왔는지를 보아 온 세대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폐허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빛’을 찾아 일어서는 모습도 보아 왔습니다.”
제2차 대전이 시작되자 키르기스스탄의 마을에서도 남자들은 빠른 속도로 전쟁터에 나갔다. 마을에는 노인과 여성과 어린이들만 남았다. 일가족의 생활은 힘들어지기만 했다. 주인이 없이 버려진 반은 기울어진 흙집에서 살았다. 아버지를 잃은 충격도 있어 어머니는 잦은 병으로 집에 누워 있는 일이 많았다.
어머니 혼자 네 명의 자식을 학교에 보낼 수 없어 14살 때 아이트마토프씨는 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년들 중에서 가장 읽고 쓰기를 잘한다는 이유로 마을의회 서기로 뽑혔다. 세금을 징수하는 일도 업무에 포함되었다. 그것은 14살의 소년에게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일손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사람들한테서 세금을 거둔다 ―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가장 싫은 일은 병사의 부고를 가족에게 전하는 일이었다. 자식이나 남편을 전쟁터에 보낸 집으로 향한다. 집에 가면 모든 가족이 불안한 표정으로 소년을 주시했다.
가방에서 손바닥에 올릴 정도의 작은 종이를 꺼낸다. 군대 도장이 찍혀 있다. 몇 줄의 글을 조용히 읽고 키르기스어로 번역해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돌산이 무너지는 듯한’ 무거운 한숨이 들린다. “아, 아들은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상냥한 그 아들을 두 번 다시 껴안을 수 없다! 내 아들이 이런 종이 한 장이 되어 돌아오다니! 아아 아아……” 소년은 고개를 떨군 채 비통해하는 어머니들 앞에 그저 서있을 뿐 어떤 위로의 말도 전할 수 없었다. 그러자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국가란 ‘인간을 연료로 해서 타는 난로’인가? 도대체 무엇이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았는가?’
첫 만남 이후 우리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대화를 거듭했다. 대화의 초점은 언제나 ‘둘도 없는 한 사람의 인간을 희생시키는 모든 악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적이란 애매한 전체주의와 국가악이다.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다. 모든 광신이다. 그리고 ‘팔기 위해서는 뭐든지 한다’는 잔혹한 상업주의다.
괴로움이 이렇게 소년의 혼(魂)을 연마하고 크게 성장시켰다. “어릴 적에 인생을 시적(詩的)인 밝은 면에서 보았다면 이번에는, 인생은 엄하게 노골적으로 괴롭게 그리고 영웅적인 표정을 내 앞에 나타냅니다.”
아이트마토프씨는 지금도 어떤 영광 속에 있을지라도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잊지 않는다. 길러 준 ‘민중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촌놈’이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소박한 대지의 향기를 잃지 않는다. 게다가 그 대지에는 두루 갖춘 섬세한 마음의 꽃들이 피어 있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가 ‘초원의 백성’에 관한 전설이나 옛날 이야기 그리고 오래된 민요를 들려 주었다. 성장하면서 인생의 고뇌에 대한 답을 문학에서 찾고자 읽었다.
문학에 대한 마음은 깊어져 스물일곱 살 때 모스크바에 있는 소련작가동맹부속의 문학학교에 입학했다.
29세에 발표한 단편소설 《자밀리아》가 프랑스 작가 루이 아라공의 눈에 띄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 극찬받은 것을 계기로 작가로서의 명성은 일약 높아졌다.
“작가의 책임은 사람들의 괴로움, 아픔, 신뢰, 희망이 담긴 ‘괴로움을 벗어나 터득한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작가는 사람들을 대표하여 발언하는 것을 위임 받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전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그 뒤’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역에서 헤어진 지 30여 년이 지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묘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의 묘’라고 새겼다. ‘아버지도 여기서 함께 잠들고 있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갑자기 아버지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키르기스스탄의 적벽돌 공장터에서 1937년 숙청하여 희생자를 매장한 ‘비밀 매장터’를 발견한 것이다. 거기에는 138명의 시체가 매장되어 있었다. 세월은 구두도 의복도 전부 썩게 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탄환이 관통한 한 장의 종이가 발견되었다. 기소장이었다. 거기에는 ‘토레클 아이트마토프’라는 아버지의 이름이 또렷하게 쓰여있었다. 54년만에 칭기즈 아이트마토프는 그렇게 아버지와 재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