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운동가’ ‘작가’ ‘경제학자’ 그리고 ‘미래학자’ 헤이즐 핸더슨 박사의 활동은 그 직함만큼이나 다양하다. 박사의 이상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인간만이 보다 나은 그리고 보다 가치 있는 미래를 꿈꾸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미래를 믿는 일은 인류를 믿는 일이다. 미래학자는 희망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전통경제학은 인간의 본성을 비관적 시각에서 바라본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로,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욕망에 의해 행동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헨더슨 박사는 반론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득을 바라지 않고 행동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서로를 소중히 아끼고 함께 나누는’ 행위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전통경제학은 화폐가치로 환산할 수 있는 경쟁활동에만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협동하고 협력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시민단체도 있다. 또한 대자연이 주는 선물은 어떠한가? 태양이 만들어내는 에너지, 태양의 따뜻함과 빛이 없다면 지구의 생명은 상상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 또한 소중한 가치가 아닌가?”
이러한 질문의 답을 찾고자 박사는 기존의 경제이론을 극단적으로 재고(再考)하게 되었다. 바로 ‘애정 경제학’이라는 사고방식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인간의 행위, 자애에 기초한 경제활동을 말한다. 유엔에 따르면, 이러한 무상(無償)의 노동력은 연간 16조 달러, 그 중 11조는 여성, 5조는 남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모든 요소를 포함하여 박사는 기존의 전통경제학자들이 만든 경제지표보다 훨씬 ‘현실적인’ 경제활동기준을 개발했다.
박사는 자신을 그저 ‘평범한 주부’라고 말한다. 자녀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그 ‘평범한 주부’의 마음이 힘이 되어 경제학 서적을 탐독하고, 마침내 노벨 경제학 수상자들의 이론에 맞설 수 있게 했다.
1960년대 뉴욕에 살던 박사는 ‘깨끗한 공기를 위한 시민의 모임’을 설립한다. “’자녀들의 미래를 살기 좋게 하고 싶다’ 는 강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은 이후 박사가 맞닥뜨린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되었다고 박사는 회상한다.
출발점은 집으로 돌아온 어린 딸의 살갗에 묻어 있던 검은 때에서 비롯되었다. 아무리 문지르고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박사 자신 또한 계속되는 기침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박사는 큰맘 먹고 아이들이 놀고 있는 동네 공원에서 만난 어머니들에게 “공기가 너무 나쁜 것 같지 않나요?” 하고 말을 건넸다. 곧바로 공감대가 넓어졌고 결국 ‘깨끗한 공기를 위한 시민의 모임’을 만들게 된다.
딸아이가 낮잠을 자는 시간을 활용, 시장(市長)을 비롯해 시청공무원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이에 대해 ‘대기오염이 아니라 바다에서 생긴 안개가 원인입니다’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냉담한 반응에 낙심하지 않고, 더욱 더 파고들어갔다. 그리고 실제 시청에서 매일 매연입자를 측정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박사와 함께한 10여명의 사람들도 일어섰다. “그렇다! 일기예보 시간에 대기오염지수도 알려달라고 부탁하자.” 박사는 워싱턴 D.C에 있는 연방통신기구(FCC) 의장에게도 편지를 썼다. 방송의 ‘공익성과, 대중의 편의, 필요성’을 책임지는 기관이다. 박사는 또한 모든 주요 방송국에도 편지를 썼다. 연방통신기구 의장 및 넬슨 록펠러 뉴욕주지사에게서 받은 고무적인 답장을 복사하여 동봉했다. 몇 주 후, 뉴욕의 한 주요 방송국 부사장에게서 “합시다.” 하고 연락이 왔다. 한 달 후, 뉴욕공기오염지수가 전파를 탔다. 3개월 후, 모든 텔레비전 방송국 및 라디오 그리고 신문사가 대기오염지수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용기를 얻은 박사는 하나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에 응하게 된다. “할 말은 한다는 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므로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방대한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박사는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연대를 구축’할 때 길은 열린다고 확신한다.
1933년 영국에서 태어난 헤이즐 핸더슨 박사는 정식으로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지 못했다. 열여섯 살 때 부인복 판매점 직원으로 일을 시작, 이후 호텔에서도 근무했다. 박사는 ‘인생의 대학’에서 공부했다고 말한다. 바로 인생의 대학에서 모든 사람에게는 아직 손대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스물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이주, 비행기표 판매원으로 일했다. 결혼 후, ‘딸에게 깨끗한 공기를 숨쉬게 하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에서 비롯된 박사는 끊임없는 노력이 오늘날까지 이르게 했다.
1998년 박사와 처음 만나 여러 주제에 관해 열띤 대화를 이어갔다. 박사는 그녀가 일으킨 환경운동의 첫걸음은 혼자였다고 회상했다. 깨끗한 공기를 호소하는 박사에게 정치가들과 전문가들이 보내온 답은 늘 똑같았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할 수 없습니다.” 박사는 그 응답 뒤에 숨어있는 경멸과 멸시의 목소리를 간파했다. ‘도대체 당신과 같은 가정주부가 세상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박사는 한걸음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만일 기존의 경제이론이 환경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고통으로 내몬다면, 분명 이 이론은 잘못되었다.’ 박사는 사람들의 행복에 초점을 맞춘 그런 경제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박사의 접근방법은 단순했다. 순진해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박사의 강인함이었다. 평범한 서민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면, 아마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만함에 사로잡히는 순간 모든 것은 빗나간다. 오만한 전문가들은 ‘아마추어’는 그냥 조용히 가만히 있으라고 얘기한다.
‘질 수는 없다’고 분기해 계속 공부했다. 그리고 여러 대학에 생태학과 경제학, 생물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그리고 물리학을 관련시킨 과목이 개설되어 있는지 문의했다. 박사는 항상 ‘전체관’에서, ‘거시적인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았다. 박사가 원하는 수업은 없었으므로, 경제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를 독학했다. 책에서 중요한 내용을 보면 저자에게 편지를 쓰거나 직접 만나 탐구의 폭을 넓혔다. 그 중에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언스트 슈마허 박사도 있다.
‘남이 하는 이야기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 ‘판단하기 전에 스스로 먼저 생각한다’는 자세는 부모님에게서 배웠다. 연구성과가 무르익어가자, 박사는 더욱 더 현대경제학의 핵심적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예를 들어, 환경을 오염시키고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는 경제활동은 경제성장 측정에 포함하는 반면, 이에 관련된 희생비용은 무시해버리는 그런 통계는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단 말인가?
박사는 결론지었다. ‘복잡하고 겉보기에는 정확한 수학공식으로 나타낸 것처럼 보이지만, 경제학은 전혀 과학이 아니다’라고. ‘오히려 중립적인 몰가치성의 과학이다’ ‘경제학은 승자의 이득은 정당화시키고 패자에게는 침묵하는데 열중하고 있다. 경제학은 가면을 쓴 정치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박사의 주장에 전통경제학자들은 소스라쳤다. 박사는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고 무시당했다.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옆에 앉아있던 경제학자는 말했다.
“그녀는 친절한 여성입니다. 하지만 경제학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요.”
반론하기 위해 더욱 많은 책을 독파하고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남편의 회사로 ‘그녀는 공산주의자다’라고 편지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로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제가 바라던 바와 전혀 상반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
한 기업의 홍보소식지에서는 박사를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고 비난했다. 지금은 박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명칭이 되었다.
박사의 전문성과 독특하고 미래지향적인 제안은 결국 인정받게 된다. 1974년부터 1980년까지 박사가 미국 기술평가자문위원회에서 근무했다. 30여 개국의 경제정책 자문에 응했다. 박사의 논설은 세계 400곳 이상의 신문, 27개 언어로 채택됐다.
또한, 자신의 투자가 환경에 도움이 되고,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한 기업행위인지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윤리적 투자’라는 개념과 관행을 홍보해왔다. 단순히 경제성장만을 고려하는 좁은 시야의 경제지표가 아닌 보다 효과적으로 삶의 질을 측정하는 경제지표를 개발했다.
하지만 박사는 무엇보다 민중에게 알리고 민중을 교육함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풀뿌리 연대구축’에 앞장서는 시민운동가로서의 자세를 관철해왔다. 박사의 저작 ‘모두가 승자인 세상’ 박사의 이상을 매우 잘 보여주는 제목이다.
박사는 “인간의 일부만이 승자가 되고 나머지 다수는 패자가 되어 괴로워하는 약육강식의 경쟁사회에서 모두 승자가 되는 공존사회로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법은 우리 모두가 서로 연관된 틀 속에서 살고 있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든 보이지 않든 본질적 도움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연의 축복이 없다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자연에 대한 감사함으로 박사는, 우리 지구의 모든 필수 에너지의 원천인 가장 가까운 별, ‘어머니와 같은 태양’을 이야기한다.
“어머니로부터 인간에 대한 믿음을 배웠습니다. 인간은 지구의 어디에 있더라도, 어떠한 문화에 속하더라고, 근본적으로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배웠습니다.”라고 박사는 말한다.
공장을 짓고 기계를 만드는 하드웨어 중심의 경제에서 이제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중심의 경제로 전환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화와 소통에 뛰어난 여성의 특별한 능력이 더욱 주목 받게 될 것이다. 박사는 여성이 ‘평화’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마음과 소질을 갖고 있다고 확신한다.
“어머니들은 자녀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다 앗아가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쟁해결에 있어서도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고위 여성관료의 토론을 관찰한 후, 박사는 자신 있게 말했다.
“만일 저 여성들에게 권한이 주어져 협상에 참여했더라면, 아마 수십 년 전에 이미 평화협정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운명을 바꿀 힘이 우리에게 있다. 나도 전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내가 지난 30년 동안 애써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