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가을, 체코 프라하. 여기저기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열광한 군중은 무대에 오르는 한 여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 1960년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사랑 받았던 인기가수다. 하지만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강력탄압 속에서 그녀의 음악인생은 갑자기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같은 일을 겪었다. ‘프라하의 봄’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호소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을 일컫는다. 그러나 소련군의 무자비한 무력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모든 예술가들의 활동은 금지되었고, 그들은 오랜 기간의 강제노동에 고통받게 된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 예술가들이 다시 일어선 것이다. 가장 심하게 탄압받았던 예술가 중 한 명은 바로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이다. 늘 당국의 감시를 받고, 가택수색을 당하고,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언제 감옥에 붙잡혀 갈지 모르기에 그는 늘 면도기와 칫솔, 치약을 지니고 다녔다. 1979년 여름, 그는 또 다시 연행되어 감금되었다. 세 번째 체포였다. 이후 강제노동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어떤 작품도 발표할 수 없었다. \
권력이 그를 노린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진실을 ‘지나치게’ 말하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똘똘 뭉친 체제에 누구나 다 공포를 느끼고 침묵하고 있을 때 그는 말로, 펜으로 ‘왕은 벌거숭이다’라고 계속 진실을 말했다.
하벨에 대한 탄압은 20년간 지속되었지만, 그는 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불굴의 신념이, 강인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불굴의 정신 앞에서 공산당 정권은 무력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힘을 냈다. 그리고 드디어 1989년의 ‘벨벳혁명’이 그의 정당함을 증명했다.
사람들은 바츨라프 하벨을 통해 희망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해 하벨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1992년 4월 일본을 방문한 하벨 대통령이 연설했다. 그의 주장은 억압을 받을 때 외치던 말과 똑같았다. “정치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또 정신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참된 지성인, 철학자, 그리고 시인의 힘으로… 정치가는 자신의 정치적 운명보다도 세계의 운명을 더욱 깊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자 여러 파벌과 이익을 도모하거나 압력을 행사하기에 급급하기보다는 오히려 시인들처럼 유일한, 게다가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 ‘양심의 소리’ 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주장 때문에 그는 투옥됐고, 이러한 주장 때문에 그는 역사를 움직여 시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끝에 ‘아마추어 대통령’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강연 다음 날, 나는 도쿄 영빈관에서 그를 만나 뵙고 말했다.
“연설 내용에 전면적으로 찬동합니다. 민중의 행복을 생각하지 않고 보신이나 금전에 얽매이는 ‘프로 정치가’ 보다 시민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아마추어 정치가’인 편이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청신합니까?”
내가 그를 만나게 된 것은, 하벨 대통령을 동유럽에서 가장 현명한 정치가라고 평가한 미국 경제학자 갤브레이스 박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대통령은 수줍어하는 듯한 소박한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시종일관 말을 고르듯 정중히 말했다.
“이 연설은 인간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휴머니즘이라는 나의 사상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지식인이 지구와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반정치적인 정치’를 말한다. “그것은 ‘아래서부터’ 실천하는 정치다. 기계적인 정치가 아니라 인간적인 정치, 강령에 따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발전하는 정치다.”
하벨의 옥중생활은 4년에 이르렀다. 자유롭게 쓸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었다. 함석의 녹을 벗기고 용접하는 일, 두꺼운 금속판을 달궈 자르는 일, 빨래터에서 시트를 빠는 일, 강추위 속에서 전기공사를 하는 일 등의 강제노역이 할당됐다.
자기 나라에서는 박해와 중상을 받았지만 외국에서는 문학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이 ‘수감자’ 에게 캐나다와 프랑스의 대학들이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체코 당국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외국의 비판이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석방하고 싶지도 않았다. ‘특별 사면을 청원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회유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에게 스스로 머리를 숙이게 하고 싶었다.
그는 거부했다. “긍지를 버리느니 살지 않는 게 낫다.” 그는 ‘희망의 힘’을 믿었다. “희망은 틀림없이 모든 게 잘될 것이라는 낙관이 아닙니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정당한 것은 어디까지나 정당하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이 곧 희망입니다.”
언뜻 보기에 아무리 무력하게 보일지라도 한 인간이 전인격(全人格)을 걸고 진실을 계속 주장하면, 이는 거짓말을 끊임없이 하는 몇천 명의 말보다도 강하다. 이 진실을 믿는 것이 그의 ‘희망’ 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도 피를 흘리지 않은 ‘조용한 혁명’ 인 1989년의 ‘벨벳혁명’이 그의 정당함을 증명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일파에서 만파로, 이것이 바로 소프트 파워의 위력이었다.
1989년 동유럽혁명을 가리켜 사람들은 대부분 서유럽 자본주의가 동유럽 사회주의를 이긴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본질은 사람들의 삶의 혁명이었다. 인권이 억압받는 사회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일어선, 사람들의 정신에서 ‘두려움을 몰아낸’ 혁명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 하고 논하는 것 자체가 낡아빠진 논의라고 말한다. 문제는 ‘정당한가, 부당한가? 진실인가, 거짓인가? 인간적인가, 비인간적인가?’라고 말한다. 전 지구적으로 ‘의식혁명’ 이 필요하다고 한다.
1989년 가을 그날 밤, 프라하의 거리에서 환호하는 군중 앞으로 인기가수가 올라선 순간 희망은 활짝 피어올랐다.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그녀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때 한 소녀가 다가가 꽃다발을 건넸다. 가수로서 그녀가 잃어버린 시간만큼의 꽃다발을. 마침내 가수는 감정에 복받쳐 목이 메이는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다시는 결코 침묵하지 않으리라.